독립의 연장선으로 세계평화를 외친 순국선열

“드높은 평화이상 바탕하고 있었네....”_순국선열의 노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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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민선 기자
기사입력 2018-11-29 [01:00]

  국가보훈처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제79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11월 17일(토) 오전 11시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해에는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 꺼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빛”이라는 주제로, 기림공연, 순국선열의 날 약사보고, 독립유공자 포상과 기념사, 기념공연, 순국선열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인 망국일,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한 날이다. 광복 이후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매년 순국선열의 날에는 노래를 제창하는데, 가사 중 아래와 같은 가사가 있다.

 

“님들이 목숨 걸고 외치고 바란 바는 오로지 일제에서 해방만이 아니었고,
세계의 정의와 질서 밝히고 이루려는 드높은 평화이상 바탕하고 있었네...”
 
 가사를 보면 순국선열들이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식민지 조선독립을 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 이상을 그리던 순국선열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무정부주의를 바탕으로 평화를 그린 백정기

▲ 백정기 의사(1896~1934)

출처 : 국가보훈처  © 길민선 기자


 백정기 의사는 15세가 되던 해인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경술국치를 겪자 울분과 굴욕감으로 구국일념을 다짐했다. 이는 이후의 3.1운동을 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국내에서 항일투쟁계획의 뜻을 잘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1921년 북경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곳에서는 신채호, 이회영, 유자명 등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의사는 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민족항일기 시기의 무정부주의는 반제(反帝)·반군국(反軍國)·반강권(反強勸)·반정부·반국가의 전면적 저항과 파괴를 강행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1924년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등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한국, 중국, 일본 등 각국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동방 국가 무정부주의자들의 단결과 국제적 유대 강화로 자유 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각 민족의 자주성과 각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이에 대해 근거로 들 수 있는 백정기 의사의 무정부주의 정신과 바라던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말이 있다.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백정기 [白貞基] - 친일 모리배 처형 (독립운동가)

 

 이 말은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상해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등을 처단하기로 하고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한 후, 일본공사의 처형에 나서기 전에 한 말이다. 이는 의사가 일제로부터의 한국독립을 바라는 동시에 전 세계의 평화를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백정기 의사가 세계평화를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동양평화를 꿈꾼 이상설 선생

▲ 이상설 선생(1870~1917)

출처 : 국가보훈처 © 길민선 기자


 이상설 선생은 을사조약 파기 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13도 의군 편성 등의 많은 활동을 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 중 한 명이다. 특히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지칭되며 개화와 국권 수호에 주력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 조약을 무효로 하고 여러 가지 조약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 당시 그는 대신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 지위에 있어 일차적으로 조약 체결이 진행되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설 선생은 슬픔에만 잠겨있지 않고,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버리면서까지 조약 파기를 위해 거국항쟁을 추진했다. 이후 선생은 국내에서의 국권 회복 운동보다는 국외로 망명하여 운동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1906년 4월,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고, 이곳에서 선생은 구미 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여겨 비밀리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임명되었다. 끝내 일제의 방해로 특사들은 회의 참석이 거부되었다. 하지만 이상설과 이위종이 각국 신문단의 국제협회에 귀빈으로 초청되어 한국의 상황을 토로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순방하며 일제의 침략 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이상설의 동양평화에 관한 생각은 안중근 의사가 공술에서 진술한 이상설의 의병 관에 대한 평가로 알 수 있다.

 

 “이상설(同人)의 의병(義兵)에 대한 관념(觀念)은 의병(義兵)을 일으키나 우리나라(韓人)는 일본(日本)의 보호(保護)를 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이토(伊藤)가 중외(中外)에 선전(宣傳)하고 있는데 그것은 決(결)코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反證)으로서는 굳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간(東洋人間)에 不和(불화)를 초래(招來)하여 인심(人心)의 일치(一致)를 맺지 못하게 되면 동양(東洋)의 평화(平和)가 스스로 파괴(破壞)되는 것을 우려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출처 :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1969. 境 警視의 訊問에 대한 安應七의 供述(第三回).

 

 이상설 선생이 13도 의군을 형성하여 의병활동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관념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의병에 대해서는 동양인 사이의 불화를 초래하여 동양평화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동양평화론에 대해 저명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이상설 선생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백정기 의사와 이상설 선생은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하지만 눈여겨 봐야 하는 점은 자국을 위해서만이 아닌 전 세계의 정세와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순국선열들이 우리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정기 의사, 이상설 선생과 같은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독립의 연장선으로 세계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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