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선생님의 모교 한신대 통일관 돌베개공원 기념석 제막식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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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문 기자
기사입력 2020-11-23 [13:36]

 

<인뉴스TV/박기문 기자/한신대장준하통일관>

 

<인뉴스TV/박기문 기자/한신대장준하통일관>

 

<인뉴스TV/박기문 기자/한신대장준하통일관>

 

<인뉴스TV/박기문 기자/한신대장준하통일관>

 

2020년 11월17일 화요일 

장준하선생님의 모교 한신대 통일관 

돌베개공원  기념석 제막식이 있었다.

 

장준하 선생님께서 발자취를 돌아볼수 있었다.

 

한신대 여기저기에는 장준하통일관

개관식및 돌베개공원 개원식 현수막이 

개관식에 함께 하고자 오신분들을 맞이하고 

한신대통일관 안으로 들어서자 장준하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유품과 흔적들을 통일관내 곳곳에서

엿볼수 있는 계기가되었다.

 

장준하 선생님께서 살아생전에 즐겨입으시던

두루마기등이 전시되 있었고.

 

장준하통일관 1층 중앙정원에는 ‘돌베개공원’을 조성해 기념석을 세웠다. 기념석에는 1971년 출간한 장준하 선생의 항일수기 『돌베개』에 중에서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문구가 각인되어 있었다.

 

장준하통일관 개관식에 

문제인대통령축하전문등 

많은 분들이 축전을 보내주셨다.

 

문제인대통령축전대독에는 

장준하선생님의 장자이신 장호권교수님께서 대독했다.

 

한신대학교 '장준하 통일관'  개소식 축전. 

한신대학교 '장준하 통일관' 개소식을 축하합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위대한 정신과 실천을 한신대학교 교정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우 감회가 깊습니다. 

 

장준하선생 님의 뜻을 잇고 알려온 장준하기념사업회 와 장호권 회장님, 한신대학교 연규홍 총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선생의 삶은 온 몸으로 애국을 실천해온 대장정이었습니다. 독립군으로 일제에 맞섰고, 전쟁의폐허 위에 인간의 가치를 심었으며. 진실과 양심으로 독재와 싸웠습니다. 

 

어두웠던 시절 <사상계>는 우리의 지성을 밝혀 주었습니다. 

 

45년 전 우리는 비통하게 선생은 잃었지만. 장준하라는 이름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뿌리 깊은 민주주의를 이뤄냈습니다. 

 

우리는 장준하 통일 관에서 선생이 가장 간절히 소망해 어떤 자주독립과 통일의 길을 만날 것입니다. '장준하 기념홀'에서 식민 지배와 독재에 무릅끓지 않는 인간의 긍지를 되새기고' 돌베개 공원'에서 애국의 대장정을 시작한스물여섯청년 장준하의 드높은 결의를 느낄 것입니다. 장준하 길 99m '의 끝에서 마지막 1m를 바라보길 바랍니다. 

 

오늘 문을 연. '장준하 통일관' 이 우리 국민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주는 공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개교 80주년을 맞은? 한신대학교가 상준아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긍지를 높여 주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1월 17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축전은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교수대독

 

이해학 목사님께서 장준하선생님과 인연 그리고 

장준하선생님께서 김재규장군님과 대화내용을 

소상히 말씀해주셨다.

역사적 증언이라고 해도 맞을것이다.

 

장준하 통일관 개관식 축사 -이해학

  2020년 11월 17일 

 

저는 20대 초, 지적 영적 갈망에 헤메일때, 을지로에서 흥사단 강연에 참여했습니다. 거기에서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서 역사신앙, 김재준 박사님을 만나서 생활신앙,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을 만나서 민족주의 라고 하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 이후에 함석헌 선생이 씨알의 소리라는 것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그것을 탄압하고 폐간시켰습니다.

 

그때 장준하 선생은 그 씨알의 소리를 몰래 인쇄를 해서 재본도 못하고 그냥 접어가지고 박상희를 통해서 밖으로 내보내면 제 친구 강은규하고 저하고 그것을 받아서 버스에서 “이럴수가 있느냐, 이런 책을 좀 봐 달라”하고 배부를 하고 또 도망쳐서 다른 버스를 타고... 이렇게 하면서 장준하선생님하고 인연을 갖었습니다.

 

저는 73년에 교회를 시작했는데, 3월 1일날 성남에서 주민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해 말 장준하 선생님은 헌법개정청원 서명운동을 백기완 선생하고 주도하다가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국이 아주 혼란한 상태에서 어쩔줄 모르다가 국무위원회에서 밤새 토론한 결과1월 18일날 긴급조치 1호를 발동시켜서 장준하 선생을 먼저 소급해서 구속시키고 제가 1월 18일날 성직자들을 동원해서 긴급조치를 제일 먼저 치고 들어가서 15년 징역을 받았습니다. 서울구치소에서 형을 받고 이제 안양교도소로 이감하는 자리에서 장준하 선생을 만났습니다.

 

이감할 때는, 교도소 갔다 오신 분은 알지만, 다 뻘거벗고 검사를 하고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뻘거벗은 몸으로 장선생님을 거기서 뵙고 그리고 안양교도소에서 같은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학생들 몇 하고 같이... 저희는 밤새 장준하 선생님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그때 한 얘기가 그렇습니다.

 

학생들 데모가지고는 박정희 정권을 절대 쓰러트릴 수 없다(장)... 그럼 어떻게 합니까... 총을 가진 군인만이 해야 한다(장)... 그러면 지금 제3세계에서 쿠데타가 연발 일어나는데 우리도 그런 악순환에 휩싸이게 될게 아닙니까... 아니다 쿠데타를 해서 박정희를 제거한 후에 민간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그런 양심적인 군인이 있으면 되는거다(장)... 그거 있습니까.... 있다(장)... 하고 자신있게 얘기를 했습니다.

 

저희는 의하해 했고 그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장선생님이 심장병이 있어서 병동으로 옮기고 제가 단식을 주도하다가 저도 격리 차원에서 병동으로 옮겨서 장 선생님하고 매일 같이 운동장을 돌면서 운동을 하고 그러면서 여러가지 중정의 얘기들... 그리고 사상계 얘기...이런 얘기드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장 선생님이) 비통하고 말도 안하시고 엄청나게 화가 나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장관이 그렇게 좋아?” 그래서 제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신문을 구해서 읽어봤습니다. 김재규 장군이 건설부장관 임명장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김재규하고 장준하 선생님하고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우리가 출소해서 박형규 목사님 재판에서 장준하 선생님을 만났는데, “이 동지, 내가 이 동지 교회를 꼭 갈려고 맘먹고 이렇게 미뤘는데, 이번 주에 갈려고 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등산 가자고 해서 거기 가게 되어 (교회에) 못가게 되었네. 다음 주에 꼭 갈게.” 그 주에 등산 가서 영 못만나고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그 시체로 돌아왔을 때 제가 그 셋방살이 하시는 데 달려갔더니 계훈제 선생님 와계셨고 문익환 목사님 와서 통곡을 하면서 꺼이꺼이 우시면서 “내가 윤동주도 갔고 이제 장준하 보고 살았는데 나 어떻게 사냐” 하고 울으시는 그 통곡을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정리를 이렇게 합니다.

 

장준하 선생님에게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이런 훌륭한 정치인이고 독립운동가인데 왜 미국이 선생님을 돕지 않고 박정희만 돕습니까?” 그럴 때 장 선생님은 “지금 박정희를 비롯해서 야당 정치인들 -몇몇 유명하신 이름을 대면서- 그분들은 다 결이 같애. 나는 달라. 그 사람들은 미국이라고 하는 종주국 아래에서 남쪽 정치만을 얘기하지만 나는 한반도 전체를 통으로 보는 정치를 하기 때문에 미국이 나를 싫어하는거야.” 하는 말씀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김재규 장군은 동대문에서 장준하 선생이 국회의원이 되셔서 국방위원으로 계실 때 가서 감사를 하는데 장준하 선생님이 철저하게 뇌물을 안 받으시고 감사하는 것을 보고 김재규 장군이 감동을 했습니다. 야 우리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희망이 있구나... 그래서 그 뒤로부터 장준하 선생님을 만나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고 학습을 하면서 이제 이나라에 정치 구도를 두 분이서 약속한 게 있습니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처단한다... 정치 개혁은 장준하가 하겠다... 그 구도가 깨졌습니다. 장준하를 먼저 살해해 버리고 그리고 김재규가 자기가 세 번이나 박정희를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건설부장관 임명장 받는 자리에서 권총을 여기(가슴)에 가지고 갔었는데 결국 쏘지 못했다... 하고 다 증거물로 제시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베게 공원을 여기에 만드는 것을 정말 다행스러운, 민족사의 열매로 생각하고, 한민족을 통으로 보는, 민족 건설을 하고자 했던, 위대한 정치인, 그리고 하늘을... 그분은 교도소에서도 책 하나도 안 봤습니다. 딱 성경책 신약성서 한 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믿음으로 민족을 통으로 사랑하는 그런 위대한 정치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 장준하의 돌베게를 이곳에 다시 세우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일을 위해 수고하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장준하 통일관 개관식 축사 -이해학목사

  2020년 11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탈영해 1945년 광복군에 가담,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49년 6월 한신대를 졸업했다. 1953년부터 월간 『사상계』를 발행했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서울 동대문(을)구)에 옥중 당선됐다. 1974년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 제1호로 구속돼 투옥된바 있다. 1975년 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생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1962년) 사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 제1회 한신상에 추서됐다. 현재는 국가현충시설인 경기도 파주 ‘장준하 공원’에 부인 김희숙 여사와 함께 영면중이다.

 

<박기문 기자/erunses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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